(1801~1840)
복녀 이성례 마리아

(1813~1866)
오반지 바오로

(?~1866)
김원중 스테파노

(1815~1866)
장 토마스

송 베네딕토 가족

박 프란치스코 부부

성지복자9위

복녀 이성례 마리아 (1801~1840)

탄생지·거주지 : 청양 다리골,  안양수리산 등
순교지 : 서울
순교·선종일(나이) : 1840. 1. 31 (39)
순교형식 : 참수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배티성지나 진천 지역과 직접 관련이 있는 순교자는 아니다. 그러나 배티성지에서는 모자의 시복 시성을 별개로 추진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일찍부터 최양업 신부와 어머니 이성례를 함께 시복 추진 대상자로 선정하여 주교회의에 제출하였고, 그 시복 시성을 위한 자발적인 기도와 공경 운동을 전개해 왔다.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이성례 마리아는 17세가 되던 해에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혼인하여 다리골(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락골)에서 살다가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이처럼 자주 이사를 한 탓에 생활은 궁핍하기 이를 데 없있지만 그녀는 이를 내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자식들에게는 요셉과 마리아의 피난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던 일 등을 들려주면서 신심을 북돋워 주곤 하였다.

1836년 마리아 가족이 부평 접프리 교우촌에 정착해 살고 있을 때, 장남 최양업 토마스가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그녀의 가족은 수리산 교우촌(현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으로 이주하였고, 남편 프란치스코는 이곳에서 회장으로 임명되어 교우들을 보살폈다.

이로부터 3년 뒤, 기해박해가 일어나 교우들이 체포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수리산 교우촌으로도 서울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그러나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던 마리아는 놀라는 기색 없이 음식을 준비해서 포졸들을 대접하고는 남편과 교우들을 따라 서울로 향하였다. 이때 그녀의 품에는 태어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스테파노가 안겨 있었고, 이 모습을 본 비신자들은 "어린애를 데리고 포도청으로 죽으러 가느냐!"고 하면서 악담을 퍼붓기도 하였다.

좌포도청에 갇힌 마리아는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수없이 매를 맞아아만 했다. 팔 다리가 부서지고 살은 너덜너덜하게 찢어졌으나, 그녀는 그리스도를 용감하게 증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적인 고통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갓난아이에 대한 모성애였다. 아기가 젖을 달라고 울어대면서 눈앞에서 죽어 가고 있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 회장이 순교하자 마리아는 자비심 때문에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죽은 뒤에 남겨질 어린 자식들에 대한 생각, 특히 젖먹이가 더러운 감방에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면서, 곤장에도 칼에도 용맹하였으나 자식 사랑에는 약해지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나악한 말을 입 밖에 냄으로써 현세와 영신의 구원을 함께 도모하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때 하느님께서 너른 인자하심으로 당신 여종의 나약함을 구제하는 은혜를 베푸셨다. 그녀가 포도청에서 풀려난 뒤 맏아들 토마스가 마카오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로 밝혀졌고, 이로 인해 다시 체포되어 형조에 수감된 것이다.

여기에서 이성례 마리아는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며 이전의 배교를 용감히 취소하였다. 뿐반 아니라 막내의 죽음을 목격하면서도 모정에서 오는 모든 나약한 생각을 물리쳐 버렸다.

육정을 극복한 혁혁한 순교 용덕! 마침내 사형 판결을 받은 마리아는 옥으로 찾아온 자식들을 만났다. 그녀는 이때 둘째인 최희정 야고보에게 "절대로 형장 근처에 오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행여나 마음이 흔들려 최후의 전투를 맞이하는 데 미흡하지나 않을까 염려했던 것이다.

사형 집행 날 아침, 야고보는 푼푼이 모아둔 돈을 들고 망니니를 찾았다. '어머니의 목을 단번에 쳐서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여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마리아는 당고개 형장(현 용산구 신계동 56)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이때가 1840년 1 월 31 일(음력 1839년 12월 27일)로, 그녀의 나이 서른아홉 살이있다.

성지복자9위

오반지 바오로 (1813~1866)

탄생지·거주지 : 이월 반지,  진천 지장골
순교지 : 청주
순교·선종일(나이) : 1866. 3. 27 (53)
순교형식 : 교수

오반지(盤池) 바오로는 충청도 진천의 반지(현 진천군 이월연 사곡리)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던 해주 오씨 집안 출신으로, 선대의 가산 덕택에 비교적 풍요로운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장성할 때까지 공부나 일에는 담을 쌓고 살았으며, 혼인한 뒤에는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날려 버리고 말았다.


40세가 훨씬 지난 1857~1858년 무렵에 우연히 천주 신앙을 접하게 된 그는, 은총으로 감화되어 교리를 배우고 셰레성사로 왼전히 새사람이 되었다. 이제 그에게서 이전의 악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교적인 체념으로 가난을 견디면서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본분을 아주 정확하게 지켜나갔다.

얼마 후 바오로는 참되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들을 데리고 진천 지장골(현 진천읍 지암리)로 이주하였다. 그의 열심은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머지않아 박해자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청주에서 파견된 포교와 포졸들이 지장골로 들이닥쳐 그를 체포하였다.

청주 진영으로 압송된 오반지 바오로는 모진 형벌 가운데서도 '나는 천주교인이오.'라는 말만을 되풀이하면서 배교를 거부하였다. 교회나 동료 교우들에게 해가 될 만한 질문을 받으면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한번은 형벌을 받고 다시 옥으로 끌려가는 도중에 곁에 있던 포졸이 몽둥이로 그의 머리를 내리쳐 피가 솟구친 적도 있었다.

딩시 옥에는 그와 함께 체포된 젊은 교우, 그리고 목천 소학골(현 천안시 북면 납안리) 출신인 배 바오로가 있었다. 영장은 이들을 유혹해서 배교시키려고 여러 차례 기생을 보냈다. 그러나 오반지 바오로는 기생이 들어올 때마다 고개를 벽 쪽으로 돌린 채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았으며, 다른 교우들에게도 자신과 같이 행동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는 옥중에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석방되는 배 바오로 편에 부쳤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 교우의 본분을 잘 지키고 남의 빚을 갚도록 해라. 그리고 만일 체포되면 주님을 위해 순교하도록 해라 "

마지막 날. 형리들은 영장의 집무실인 읍청당 앞으로 오반지 비오로를 끌어냈다. 영장은 달콤한 유혹의 말로 다시 한 번 배교를 유도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증거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 한마디뿐이었다. " 만 번 죽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할 수 없소. "

바로 그 순간, 그 옆에 있던 형리가 바오로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으니, 이때가 1866년 3윌 27일(음력 2윌 11 일)로, 그의 나이 53세였다. 순교 직후 "백일 청천에 푸른 무지개가 떠서 순교자의 시신에서부터 하늘까지 닿았다. "고 전한다. 하느님께서 손수 놓아주신 무지개 다리를 건너 하늘에 오른 것이다.

바오로의 시신은 이후 아들과 신자들 몇 명에 의해 지장골로 옮겨졌고, 그 인근의 야산(현 진천읍 사석리 산109-1)에 급하게 안장되었다. 이로부터 151년이 지난 2017년 1윌 28일(금). 청주교구의 ' 복자 오반지 바오로 묘소 이장위원회 ' 에서는 진천 사석리에 있는 복자 묘소에서 유해를 발굴하여 진천 성당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이튿날인 4윌 29일에는 배티성지의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 성당에서 교구장 장봉훈(가브리엘) 주교의 주례로 이장 미사가 봉헌되었으며, 미사 후에는 복자의 유해와 진토가 새 묘소(현 백곡면 양백리 815-2)에 봉안되었다.

성지복자9위

김원중 스테파노 (?~1866)

탄생지·거주지 : 진천 발래기
순교지 : 공주
순교·선종일(나이) : 1866.12.16
순교형식 : 교수

진천의 발래기와 그 이웃의 퉁점(현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 발래기의 본래 이름은 ' 바라배기 '이니 마을 뒤의 바라처럼 생긴 산이 있다는 데서 유래된 마을이고, 퉁점은 놋그릇을 만들던 마을이라는 뜻이다. 멍심이(명암리) 골짜기의 끝자락, 박해를 피해 인적이 없는 산곡을 찾아 헤매던 신앙 선조들이 마지막으로 복음의 둥지를 틀었던 곳이다.

김원중 스테파노가 언제 발래기 교우촌에 정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니, 교우들 사이에서는 성품이 순량하고 온후하며, 열심과 신덕이 뛰어난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진천 관아에서는 멍심이 골짜기에 천주학쟁이들이 모여 산다는 소문을 듣게 되있다. 이에 현감은 아전을 보내 마을을 탐문한 뒤,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하고는 " 다시는 천주학을 봉행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서적을 바치고 직접 관장 앞에 나와 다짐을 하라." 고 명하였다.

순간 대부분의 교우들은 겁을 집어먹고 놀라움과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스테파노는 " 천주교를 신봉하는데 어찌 배교 행위를 하겠느냐? ”고 하면서 "서적도 바칠 수 없고 관아에 출두하지도 않겠다." 고 공언하였다.

마음이 약해진 교우들은 현감의 분부대로 천주교 서적을 바치고, 다시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고는 오히려 용감한 그리스도의 용사를 원망하기 시작하였다. 인근의 비신자들까지도 나서서 스테파노에게 관아의 명을 따르라고 종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앙을 위해 그 모든 것을 감수했으니, 마음속으로 순교 원의를 다지고 있던 그에게 이러한 비난은 그다지 문제 되지 않았다.

1866년 10윌 4일(양력 11 윌10일). 진천 관아에서는 다시 발래기로 전갈을 보내 "천주학쟁이들은 모두 관아로 들어오라." 고 명하였다. 이 말을 들은 스테파노는 교우들에게 "이제 관아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죽옴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니 순교를 각오한 교우들만 들어가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하면서 자신이 앞장서겠다고 단언하였다.

교우들은 조바심 속에서 하룻밤을 지내야만 하였다. 그 사이에 진천 현감은 천주학쟁이들이 도망할 것을 우려하여 날이 밝자마자 포교배를 파견하였고, 발래기로 들이닥친 포교들은 마음이 악해진 교우들을 꼬드겨 열 사람을 대표로 체포하였다. 물론 김원중 스테파노도 그 안에 포함되었다.

현감은 교우들 앞에 형구를 죽 늘어놓게 하고는 위엄을 차린 뒤 물었다. "일전에 바친 사학 서적들은 누구의 것이냐?" 그러자 스테파노가 다른 교우들을 제지하면서 앞으로 나가 대답하였다. "이 책들은 모두 소인이 갖고 있던 것입니다."

이윽고 형벌이 시작되자 마음이 약한 교우들은 쉽사리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순교를 각오한 스테파노와 몇몇 용감한 교우들은 "결코 천주 신앙을 버릴 수 없다" 고 증거하였다. 몇 날 몇 차례의 형벌에도 그들이 굴하지 않자 현감은 공주 감영으로 파발을 띄워 이 사실을 감사에게 보고하였고, 감사로부터 "감영으로 올려라." 는 회신을 받았다.

스무닷새가 지난 10윌 그믐. 진천을 떠날 때 스테파노는 비밀리에 아내에게 편지를 전하면서 이렇게 당부하였다. "주님 명에 순종하면서 살다가 죽은 후에 천당에 가서 서로 만날 수 있기를 바라오, 나는 공덕이 없으므로 주의 도우심만을 믿고 가려 하오."

일행이 감영에 도작하자 다시 문초와 형벌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권면하면서 모든 고통을 참아 받았다. 그런 다음 옥중에서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의 영광을 얻있으니, 그때가 1866년 12월 16일(음력 11월 10일)이었다.

성지복자9위

장 토마스 (1815~1866)

탄생지·거주지 : 수원 느지지, 진천 배티
순교지 : 청주
순교·선종일(나이) : 1866(51)
순교형식 : 참수

서해 바닷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수원의 느지지 마을(현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 안동 장씨들의 고향이다. 이곳에서 태어난 장 토마스는 어려서부터 복음 말씀을 꿀처럼 달게 먹으면서 하느님의 종으로 자랐다. 일찍이 영세 입교한 부모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1866년의 병인박해 때 갈매못(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순교한 장주기 요셉 성인은 그의 6촌 형제가 된다.

1845년 무렵, 그의 집안은 다가오는 박해의 손길을 피해 전국의 산간 지대로 흩어져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 토마스의 가족은 진천 배티 교우촌(현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정착하였고, 장주기 성인은 배론(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정착하였다.

배티 교우촌은 천혜의 조건 때문에 오랫동안 피신처요 안식처 역할을 해온 교우들의 비밀 신앙 공동체였다. 1850년에 다블뤼(안 안토니오) 성인 주교가 최초의 조선교구 신학교를 운영한 곳도 여기요, 1853년 여름부터 최양업 신부가 본당 중심지로 삼은 곳도 바로 이 마을이었다. 성당 겸 사제관으로 이용된 집은 방 두 칸짜리 초가. 이후 프티니콜라(박 미카엘) 신부와 페롱(권 스타니슬라오) 신부도 이 집에 머물렀다.

토마스의 가족이 배티에 정착하게 된 이유는 가까운 친척 장 시몬 회장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몬 회장은 다블뤼 주교 때부터 열심히 교우촌 신자들을 돌보았고 페롱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의 믿음직한 복사로 일한 열심한 교우였다.

이러한 분위기 아래서 장 토마스는 교우들과 함께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면서 하나 있는 아들을 하느님의 종으로 키우는 데 노력하였다. 가까운 친척과 친구들은 그의 본심이 순량한 탓에 그에 대해 말할 때면 으레 '착한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시작된 후 토마스는 이 마을 저 마을에서 교우들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교우촌 신자들은 불안해했지만, 그는 박해의 손길이 닥쳐올지라도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주님의 명을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우들의 재물을 노리거나 공을 세우려는 밀고자와 포교배들은 더욱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인적이 눈에 뜨이지 않는 산골짜기까지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결국 배티 교우촌도 오래지 아니하여 천주학쟁이 마을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있고, 밀고자를 앞세운 청주 포교배가 들이닥쳐 토마스의 가족과 교우들을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진천 관아로 압송된 토마스는 현감 앞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현감이 "천주교를 배반하면 죽이지 않을 것이며, 너의 세간을 돌려주어 그대로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유혹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세간과 목숨은 버릴지언정 배교는 할 수 없습니다. 어찌 하느님을 배반하겠습니까?"

마침내 토마스는 진천에서 청주로 압송되었고, 영장 앞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거듭되는 매질과 배교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이윽고 영장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즉시 처형을 실행토록 하였다. 형장은 군대 지휘소로 사용되던 장대(將臺)였다. 바로 그 순간, 토마스는 댓 걸음 떨어진 곳에서 형벌을 받던 대자가 약해지는 말을 하는 것을 설핏 보고는 그를 항해 외쳤다. "하느님을 위해 천주교를 봉행해 왔는데, 이런 기회를 버리고 목숨을 건진다면 장차 하느님의 벌을 어찌 면할 것인가? "

토마스는 형리들에게 이끌려 조롱하는 구경꾼들의 거리를 지났다. 그런 다음 읍성 북문 가까이 있는 장대에 도착한 뒤 칼날 아래서 천상의 북을 울렸으니, 당시 그의 나이 51세였다.

성지복자9위

복자 송 베네딕토
베드로 부자와 며느리 이 안나

탄생지·거주지 : 충추 서촌, 진천 배티
순교·선종일(나이) : 1867(69, 46, 26)
순교지 : 서울

세례성사를 받고 다시 태어난 선조들은 사랑과 극기의 거룩한 삶 안에서 미사성제에 참여하고 성사를 받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살았다. 가난한 가운데서도 오죽잖은 음식을 남에게 나누어 주고,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봉사를 생각했으며, 교리 실천을 영성의 바탕으로 삼았다. 그들은 때때로 밀고의 대상이 되면서까지 복음 전파의 사명을 잊지 않았고, 마침내는 하느님의 밭에서 2만 5천 명에 달하는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진정한 실천의 영성은 박해의 칼날 아래서 순교의 용덕으로 승화되곤 하였다. 교우들은 가정 공동체 안에 뿌리를 내리고, 비밀 교회인 교우촌 안에서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기도하였다. 보호막 역할을 해주던 교우촌이 박해로 파괴된 후에는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또 다른 성가정과 교우촌을 이룩하곤 하였다. 배티 교우촌의 송 씨 가정도 박해 가운데서 일구어진 성가정 가운데 하나였다.

충주 서촌(현 음성군의 서쪽 지역)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송 베네딕토는 나이가 들어 천주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 얼마 안 되어 진리에 눈을 뜬 그는 진심으로 이를 받아들였고, 이후로는 언제나 천상의 영광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베네딕토가 받아들인 복음의 씨앗은 이내 가족들에게 전해졌다. 이때부터 온가족이 교리 안에서 살게 된 송 씨네 가족은 여러 차례의 위험을 겪으면서도 흔들림 없이 성가정의 틀을 굳건히 지켜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미신에 빠져 있던 이웃들의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하였고, 신앙생활도 자유롭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 베네딕토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아들 베드로와 의논한 끝에 좀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열심한 교우들이 사는 곳을 찾아 이주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찾은 곳이 바로 진천의 배티 교우촌이었다. 송 씨 가족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평화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이 평화를 깨트려 버리고 말았다.

처음 박해 때 송 씨 가족은 체포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포졸들이 물러가자 산속으로 피신했던 교우들도 다시 교우촌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불안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듬해 봄,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러 충청도까지 내려온 서울 포교와 포졸들이 배티 교우촌을 다시 휩쓸어 버리고 말았다.

포졸들의 몽둥이와 칼날이 어지러운 가운데 송 씨 가족도 여럿이 체포되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베네딕토를 비롯하여 아들 베드로, 베드로의 처녀 딸, 그리고 베드로의 며느리 이 안나와 안나의 젖먹이 아들 등 모두 5명이었다. 송 씨네 며느리 안나 또한 인천 재궁골에 살던 이여규 요한의 누이동생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오고 있었다.

진천 관아로 압송된 일가족은 한마음이 되어 문초와 형벌을 참아 받았다. 그런 다음 경기도의 죽산 관아로 끌려가 다시 시련을 겪어야 했으며 마침내는 서울로 압송되어 박해자들의 노리개가 되었다.

서울에서의 옥살이와 형벌은 송 씨 가족에게 더없는 고통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그때가 1867년이었다. 당시 베네딕토의 나이는 69세, 아들 베드로의 나이는 46세, 베드로의 며느리 안나의 나이는 26세, 처녀 딸의 나이는 17세였다.

아쉬운 것은 송 씨 가족이 마지막에 어떠한 형벌을 받았고, 어떻게 순교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처녀 딸의 세레명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한갓 현존하는 우리의 기록일뿐, 하느님 대전에서 그들은 이미 영광의 화관이 되어 있있다.

성지복자9위

복자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

탄생지·거주지 : 청주, 진천 절골
순교·선종일(나이) : 1868. 9. 28(33)
순교지 : 죽산

진천 백곡의 절골(현 진천군 백곡면 용덕리)은 골짜기 끝자락에 있는 아주 협소한 지역으로,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박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가 부모와 아우, 맏아들 안토니오와 세 이들을 데리고 이곳에 정착하였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청주에서 이주해 온 것이다.

화전에 조나 콩, 수수 등을 심어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생활이었지만, 프란치스코의 가족은 잠시나마 신앙 안에서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66년의 병인박해는 이 오지에 사는 그의 가족에게도 위협이 되고 있었다. 다행히 처음 박해 때는 포졸들의 발길이 여기까지 미치지 않은 탓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신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한 때문이었다.

1868년의 무진년에 이르러 박해가 다시 가열되자, 포교배들은 더욱 날뛰기 시작하였고, 밀고자들은 교우들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독일 출신의 약탈자인 오페르트(E. J. Oppert)일행이 충청도 덕산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치고만 사건 때문이었다.

그 해 9월 5일(음력 7윌 19일). 교우들이 있음직한 진천의 산간지대를 뒤지고 다니던 경기도 죽산의 포졸들이 마침내 절골로 들이닥쳤다. 프란치스코의 가족은 이를 눈치 채고 혼비백산하여 산중으로 피신하였으나, 도중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어린 자식을 업고 숨어 있던 그의 아내 마르가리타는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흠씬 두들겨 맞아야만 하였다.

저녁 거미가 내린 뒤 프란치스코는 가족들도 찾을 겸 포졸들의 동정도 살필 겸 해서 산에서 내려왔다. 그러다가 이웃 마을의 한 비신자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 비신자는 프란치스코에게 "내 집에 자면서 동정을 살피는 것이 마땅하다."고 안심을 시켰고, 프란치스코는 의심 없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비신자는 프란치스코의 재산을 약탈하려는 밀고자의 심보를 얼굴 뒤에 가리고 있었다.

밤중에 집을 빠져나간 비신자는 포졸들이 머무는 주막으로 가서 "천주학쟁이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집에 있다" 고 밀고하였고, 프란치스코는 곧 체포되고 말았다. 그가 끌려간 곳에는 아내 마르가리타가 홍사에 묶여 있었다.

이내 죽산 관아로 압송된 그들 부부는 갖가지 문초와 형벌에도 결코 굴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프란치스코는 마음씨 좋은 형리를 통해 아우 필립보에게 소식을 전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당부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우리 부부는 위주치명(爲主郵I命)할 것이니, 네가 혹 잡혀서 죽지 않는다면 어린 조카들을 잘 보살피고, 부모께 효도하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공경하거라. 그런 다음 하느님께서 안배하시는 대로 순명하며 살다가 죽은 뒤 천국에서 영원히 만나자.

프란치스코와 마르가리타 부부는 이후에도 갖가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86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 두 손을 마주잡고 순교했으니, 당시 프란치스코의 나이는 33세였다.

하느님의 종들은 이들 부부처럼 형벌 가운데 찰나의 세상을 등지곤 하였다. 한겨울에 물을 뒤집어쓴 채 얼어 죽기도 했고, 길에서 매를 맞아 죽기도 하였다. 옥에서 목 졸려 죽고, 30대도 버티기 어렵다는 곤장을 100대, 200대씩 맞으면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이것을 본 비신자들은 '귀신이 씌웠다'고 놀라워했다. '불가능한 말을 지어내 시람들을 유혹시킨다'고도 했다.

그러나 교회사가들은 이것을 '순교의 기적'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들의 조롱에 이렇게 반문한다 "하느님의 섭리를 일지 못하는 비신자들의 어리석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