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 기도와 공경운동은 여러분들의 몫이요,
신앙 후손들의 의무입니다."

한국의 카타콤이라고 하는 박해기의 교우촌

한국 천주교회가 100년의 박해를 받는 동안, 신앙 선조들은 그 누구도 살 수 없을 정도로 척박한 산간 지대로 들어가 몸을 숨긴 채 실아가야만 했습니다. 바로 그 시절 이곳 '배티' 골짜기와 산 너머 이곳저곳에는 비밀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모방(나 베드로) 성인 신부님은 1837년 5월 샤스탕(정 야고보) 성인 신부님과 함께 배티 교우촌에서 3~4일을 유숙하며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있고, 이로써 배티 교우촌은 충정도 최초의 공소로 설정되었습니다.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6년)를 거쳐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날때까지 교우촌 수는 더욱 늘어났습니다. 기록에 그 이름이 보이는 교우촌만 해도 배티·삼박골·은골을 비롯하여 정삼이골·용진골·절골·지구머리· 동골 · 지장골 · 발래기 · 퉁점, 조금 떨어진 원동 · 새울 · 굴티 · 방축골 등 15곳이나 됩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카타콤! 오죽하면 윤의병(바오로) 신부가 박해 소설〈은화〉(숨은 꽃)의 주요 무대를 이곳으로 정했겠습니까. 신자들은 하늘을 가린 나무와 구름이 박해자들의 눈과 귀를 가려주도록 기원하면서 움막을 짓고, 화전을 일구고, 숯가마를 운영했습니다. 교우들은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면서도 언젠가는 영원힌 천당의 복락을 얻을 수 있다는 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최초의 조선대목구 신학교 마을

다블뤼(안 안토니오)성인 주교님은, 아직 신부였을 때인 1850년에 대목구장 페레올(고 요한) 주교님으로부터 ‘조선대목구 소신학교’ 설립의 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배티 교우촌 안에 신학교 교사(소성당 및 사제관 겸용)로 사용할 집을 마련했습니다. 교우촌 가운데 위치한 방 두 칸짜리 초가집이었습니다. 다블뤼 교장 신부님은 1853년 여름까지 배티에 상주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교우촌 순방에 나섰고, 그 뒤를 이어 최양업 신부님이 배티 신학교를 맡았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신학생들을 지도하면서 그들의 유학도 준비했습니다. 그 결과 1854년 3월에는 신학생 3명(임 빈첸시오, 김 사도 요한, 이 바울리노)이 말레이시아의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이후 배티 신학교는 문을 닫고 제천 배론(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새 신학교가 설립되지만, 초가집 성당 겸 사제관에는 최양업 신부님, 프티니콜라(박 미카엘) 신부님, 페롱(권 스타니슬라오) 신부님 등이 오랫동안 거처했습니다.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사목 활동 거점

최양업 토마스(1821 ~1861 년) 신부님!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요, 두 번째 사제.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과 이성례(마리아) 복자의 장남. 현재 시복 시성을 위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착한 목자요 백색 순교자입니다. 1836년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최양업 신부님은 그곳 신학교와 필리핀의 마닐라, 만주의 팔가자 등지를 전전하면서 사제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러다가 1849년 4월 15일에는 마침내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게 됩니다. 이후 신부님은 요동의 차구 성당(현 요녕성 장하시 용화산진)에서 7개윌 동안 사목하다가 귀국했습니다. 그리고 선종하는 순간까지 11년 6개윌 동안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일생을 바쳤습니다.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강원도 등 다섯 개 도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순방하기 위해 '길에서 살았고, 길에서 하느님을 만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용맹한 군사가 되려고 했습니다. 신부님은 1853년 여름에 배티 조선대목구 신학교의 지도를 맡은 이후 약 3년 동안 배티 교우촌을 사목 중심지요 본당으로 삼았습니다. 또 사목 순방이 끝나는 9~1O윌에는 배티 사제관에 거처하면서 저술에 몰두했습니다. 글을 잘 알지 못하는 교우들을 위해 여러 편의<천주가사> 를 짓고, 최초의 한글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와 한글 교리서인 '성교요리문답'도 지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결국 과로에 장티푸스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의식이 꺼져 가는 가운데서도 신부님은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들을 불렀다고 합니다. 선종일은 1861년 6월 15일. 나이는 만 40세였습니다. 그분의 시신은 가매장되었다가 같은 해 11월 초 제천 배론으로 옮겨져 안장되었습니다.

복자 9위를 탄생시킨 순교자들의 본향

배티와 인근에는 유명·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가 산재해 있습니다. 배티성지에 복자 오반지(바오로)의 묘소가 있고, 배티·은골·삼박골·백곡 새울 등지에도 순교자 묘소가 있습니다. 또 배티의 '6인 묘'과 '14인 묘'에는 이름 없는 들꽃처럼 살다가 신앙 때문에 순교한 선조들의 줄무덤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박해기에 배티 일대에서 체포된 순교자수는 모두 34명에 이릅니다. 그 중에서 지장골 출신 오반지(바오로), 배티 출신 장 토마스, 절골 출신 박경진(프란치스코) 등 8명과 최양업 신부님의 모친 이성례(마리아) 등 9명은 2014년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성지에서는 이들 9명의 시성과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을 위한 자발적인 기도와 공경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배티 인근의 순교자 묘소 28기
  • 묘소이름
  • 순교 복자 오반지 바오로 묘(1기)
  • 유 데레사와 남편 순교자 묘(2기)
  • 박 바르바라와 시누이 윤 바르바라 순교자 묘(2기)
  • 이호준 요한의 아내와 딸 순교자 묘(2기)
  • 이 스테파노 순교자 묘(1기)
  • 무명 순교자 6인 묘(6기)
  • 무명 순교자 14인 묘(14기)
  • 묘소위치
  • 배티성지
  • 배티 옛 성당터와 은골
  • 백곡 공소
  • 배티 삼박골
  • 이월면 새울 공소
  • 배티 성재골
  • 배티고개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