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 토마스 신부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요 두 번째 사제인 최앙업 신부의 세례명은 토마스이고, 본관은 경주, 아명은 양업(良柔), 관명은 구정(九驪)이다. 1839년의 기해박해 순교자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과 복자 이성례(마리아)의 장남으로, 1836년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며, 마카오와 북만주의 팔가자(八家子) 등지에서 공부한 뒤 1849년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런 다음 한국인 성직자로는 처음으로 요동 땅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사목했으며, 귀국한 뒤로는 11년 6개윌 동안 오로지 선교 활동에 힘썼다. 그는 험한 산곡을 돌아다니면서 박해받는 신자들을 찾아 성사를 주고, 그 민초(民草)들을 위해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지어 널리 전파한 ‘땀의 순교자’였다.

연보

1821.3.1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복자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충남 청양의 다리골(현 다락골)에서 출생

1836.2.6

경기도 부평에서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서울의 모방 신부댁에 도착

1836.12.3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 안드레아와 함께 마카오로 출발

1842.7.17

마카오의 조선교구 신학교를 출발하여 귀국로 탐색

1844.12

중국 팔가자에서 김대건과 함께 부제 수품

1846.1~2

조선 동북방을 통한 귀국로 탐색 여행 홍콩에서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 을 라틴어로 번역

1847초

상해 성당에서 사제 수품

1848.4.15

요동의 차쿠 성당에서 한국 사제로서는 최초로 중국 신자들을 대상으로 사목

1849.5~12

의주 변문을 통해 조선으로 귀국

1849.12말

11년 6개월 동안 박해의 위험을 무릅쓰고 5개 도에 퍼져 있는 교우촌을 순방하는 동시에 <천주가사>를 지어 보급

1850이후

한글본 '성교요리문답'과 '천주성교공과' 편찬 활동

1853~1856

충북 진천의 배티 교우촌에 있는 조선교구 신학교 겸 성당 사제관에서 거처

1854.3

조선 신학생 3명을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로 파견

1861.6.15

사목 보고차 상경하던 중 진천의 한 공소에서 과로와 장티푸스로 선종

신학생 선발과 유학 생활

최양업 신부 가족 이주 경로

1821년 3월 1일 홍주의 다리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락골 새터)에서 태어난 최양업은 어렸을 때부터 성 가정의 신앙 안에서 생활하였다. 그의 집안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증조부인 한일(漢馹) 때였고, 서울에서 지금의 청양 땅으로 이주한 것은 1791년의 신해박해로 시련을 겪은 조부 인주(仁柱)가 증조모를 모시고 낙향하면서였다.
부친 최경환은 1827년경에 가족들을 이끌고 서울로 이주해 살았다. 자유롭고 진실한 교리 실천을 위해서였다. 그 후 박해의 위험이 있게 되자, 부친은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강원도 김성과 경기도 부평으로 이주했으며, 1838년에는 과천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에 정착하였다. 이후 최경환은 수리산 교우촌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자신의 본분을 다하였다.

최양업은 부평 접프리(현 경기도 부평시 경서동의 진펄이로 추정됨) 교우촌에서 살고 있을 때, 지도층 신자들에 의해 신학생으로 추천되어 1836년 2월 6일 서울 후동(현 서울 종로구 주교동 인근 마을)의 모방(Maubant, 羅 베드로) 신부댁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라틴어를 배우던 소년 최양업은, 같은 해 12월 2일 동료 신학생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과 함께 모방 신부 앞에서 서약을 하고, 이튿날 중국으로 돌아가는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중국 이름은 여항덕) 신부와 함께 서울을 출발하였다. 당시 이들을 안내한 이들은 교회 밀사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이광렬(李光烈, 요한) 등이었다.

신학생 일행은 의주를 거쳐 12월 28일 중국 요동의 변문(邊門, 즉 봉황성 책문, 현 요녕성 城市의 변문 마을)에 도착하여 조선 입국을 기다리고 있던 샤스탕(Chastan, 야고보) 신부를 만났다. 그런 다음 중국 산서성 출신 안내자들을 따라 받아 심양, 내몽고의 마가자(馬架子, 현 내몽고자치구 赤峯市 松山區 東山鄕의 동산천주당), 하북성의 서만자(西湾子, 현 하북성 張家·市 崇禮 서만자진), 산서교구청이 있던 태원(太原) 등을 경유, 1837년 6월 7일(음력 5월 5일)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현 마카오 카모에스 공원 입구 오른쪽 아파트 부근)에 도착하였다.

마카오 도착 이후 최양업은 동료들과 함께 대표부 안에 마련된 임시 조선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마카오의 대표는 르그레즈와(Legregeois) 신부였고, 신학교 교장은 칼르리(Callery) 신부였으며, 대표부에 거주하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돌아가면서 라틴어, 프랑스어, 교리, 성가, 철학, 신학 등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동료 최방제는 마카오에 도착한 해에 열병으로 사망하였고, 최양업과 김대건은 1839년에 한때 필리핀 마닐라의 롤롬보이(Lolomboy, 현 마닐라 북쪽 60km의 Bulacan 주 Bocaue 지역의 수원 성안드레아수녀회 롤롬보이 성지)로 피신해서 공부를 해야만 하였다. 롤롬보이에 있는 동안 최양업은 부친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 편지는 밀사 조신철을 통해 조선에 전달되었다. 최양업과 김대건이 철학 과정을 마치고 신학 과정에 입문한 것은 1841년 11월경이었다.

1842년 7월 17일. 최양업은 통역 자격으로 브뤼니에르(de la Brunière, T) 신부와 함께 프랑스 함대의 중령 파즈(Page)가 지휘하는 파보리트(la Favorite)호를 타고 마카오를 떠나게 되었다. 그에 앞서 최양업은 만주 선교사 브뤼니에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있었다. 이어 브뤼니에르 신부와 최양업은 8월 23일 상해에 도착하여 27일과 31일경에는 먼저 마카오를 떠났던 조선 선교사 메스트르(Maistre, 주 요셉) 신부와 김대건을 각각 만났고, 9월 11일에는 장박교(張朴橋, 현 상해 송강구 · 산 아래 마을)에 있던 베시(L, Bési, 羅伯濟) 주교댁으로 가서 10월 1일까지 지냈다.

그러나 프랑스 함장의 약속 불이행으로 인해 일행은 함대와 헤어져 북상할 수밖에 없었다. 10월 12일 상해 숭명도를 출발한 최양업 김대건 일행은 23일 요동의 태장하(太莊河, 현 요녕성 莊河의 옛 해변 마을)에 상륙하였고, 25일에는 그 북쪽의 백가점(白家店) 교우촌(현 장하시 善花山의 大天主堂 용화산 공소)에 도착하였다(1차 귀국로 탐색 여행). 이곳에서 김대건은 조선 입국로 탐색을 위해 떠나고, 최양업은 브뤼니에르 신부와 함께 양관(陽關) 성당(현 요녕성 蓋州市··崔家店의 개추천주당 공소)을 거쳐 북상하였다. 11월경, 최양업은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éol, 高 요한) 주교가 머물고 있던 북만주의 팔가자(八家子) 교우촌(현 길림성 장춘시 寬城區 合隆鎭 팔가자촌의 소팔가자천주당)에 도착해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1843년 3월, 최양업은 기해박해로 인해 순교한 부모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31일에는 양관에서 있은 페레올 주교의 서품식에 참석한 뒤,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팔가자로 돌아와 신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최양업은 프랑스로 귀국해 있던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였다.

최양업 신부 여정도
우리 부모와 형제들을 따라갈 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제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의 용사들의 그처럼 장렬한 전쟁에 참여하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동포들이며, 이렇듯이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 종들의 피가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넘치는 자비와 당신 팔의 전능을 보이소서. 언제쯤이나 저도 신부님들의 그다지도 엄청난 노고와 저의 형제들의 고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수난에 부족한 것을 채우고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최양업 신부의 1844년 5월 19일자 서한)
최양업 신부 귀국 탐색로

1844년 12월 10일경 최양업은 김대건과 함께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았다. 이후 김대건 부제는 귀국로를 탐색하기 위해 떠났고, 최양업 부제는 팔가자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1846년 초에는 귀국을 위해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두만강 근처의 훈춘(琿春, 현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성바오로수녀회의 양로원 소재)으로 가게 되었다(2차 귀국로 탐색 여행), 그들 일행은 이곳에서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이후 최양업은 팔가자로 돌아와 신학 공부를 계속하면서 다른 신학생들을 지도하였다.

한편 1845년 8월 17일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해 활동하던 동료 김대건 신부는 병오박해로 체포되어 다음해 9월 16일에 순교하였다. 본래 페레올 주교는 최양업 부제를 먼저 사제품에 올릴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교회법상의 나이 제한 때문에 그를 사제품에 올리지 못했고, 그러다가 이미 귀국로 개척 경험이 있는 김대건을 조선 입국의 동반자로 결정하면서 그를 먼저 사제품에 올리게 되었다.

최양업 부제는 1846년 말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다시 한번 귀국로를 탐색하던 중 변문(즉 봉황성 책문)에서 병오박해 소식을 듣게 된다(3차 귀국로 탐색 여행), 그리고 조선 교회 밀사들의 만류에 따라 귀국을 포기하고,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가 이전(1847년 초)되어 있던 홍콩으로 출발하였다.

사제 서품과 사목활동

1847년 초 홍콩 대표부에 도착한 최양업 부제는 페레올 주교가 보내온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파리로 보냈다. 또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조국에서의 애통한 소식에 대해 알리기도 했다.

마침내 지루했던 기나긴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저의 동포들한테 영접을 받으리라 희망하면서 크게 기쁜 마음으로 용약하며 변문(즉 봉황성 변문)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변문에 도착해 보니 이 희망이 산산이 무너졌습니다. 너무나 비참한 소식에 경악하였고, 저와 조국 전체의 가련한 처지가 위로 받을 수 없을 만큼 애통했습니다.....특히 저의 가장 친애하는 동료 안드레아 신부의 죽음은 신부님께서도 비통한 소식일 것입니다.(최양업 신부의 1847년 4월 20일자 서한)

같은 해 7월 28일, 최양업 부제는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프랑스 해군 라피에르(Lapierre, 位別 耳)가 지휘하는 글로와르(la Gloire)호를 타고 조선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신치도(薪島, 현 군산시 옥도면 신시도리) 뒷바다에서 좌초함으로써 8월 12일 그 섬에 상륙하였다가 상해로 회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4차 귀국로 탐색 여행), 이때 최양업은 통역으로 프랑스 함대에 동승하였던 것 같다.

상해에 도착한 최양업은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생활하다가 1848년에 설립된 예수회의 서가회( 徐家庭) 신학원(현 상해시 徐羅區 浦西路의 서가회 주교좌 천주당)에서 마지막 신학 수업을 마쳤다. 그리고 1849년 4월 15일(白主日)에는 마침내 나폴리 성가회 소속의 강남 대목구장 마레스카 (Maresca, 地方濟) 주교의 집전 아래 상해 장가루 성당(家德聖堂 혹은 김가항성당 · 金家苦聖堂이나 신학원 경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직후 최양업 신부는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해로를 통한 귀국을 시도하여 페레올 주교와 약속되어 있던 백령도까지 갔으나 신자들이 타고 온 배를 만날 수는 없었다(5차 귀국로 탐색 여행), 이에 최 신부는 상해로 귀환했다가, 1849년 5월에는 요동으로 가서 훗날 제4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는 만주교구 선교사 베르뇌(Berneux, 張敬- 시메온) 신부 아래서 사목 실습을 시작했다. 그리고 6월 21일에는 정식으로 사목 선서를 한 뒤 보좌 신부로 활동하게 된다. 한국인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땅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사목하게 된 것이다. 당시 베르뇌 신부와 최 신부가 사목하던 곳은 요동의 차구 성당(백가점 교우촌 인근 : 현 요녕성 장하시 용화산진의 대련 천주당 용화산진 공소)이었다.

최양업 신부는 1849년 11월 초 요동으로 온 메스트르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다시 귀국을 시도한 끝에 봉황성 변문에서 조선 교회의 밀사를 만나게 되었고, 12월 말에는 밀사들이 '서양 선교사가 입국하는 것은 아직 위험하다'고 하는 권유에 따라 메스트르 신부를 요동에 남겨둔 채 단신으로 귀국하였다. 다섯 번째의 귀국로 탐색에 실패한 뒤 여섯 번째 탐색 여행에서, 그리고 신학생으로 서울을 출발한 지 13년 만에 귀국한 것이다.

1850년 초 서울에 도착한 최양업 신부는 훗날 제5대 조선교구장(1857년 주교 서품)으로 임명되는 성 다블뤼(St. Daveluy, 安敦伊 안토니오)신부와 페레올 주교를 먼저 만났다. 그런 다음 6개월 동안 전국 5개 도에 흩어져 있는 교우촌을 처음으로 순방하였다. 그리고 7월에는 셋째 아우 우정(禹鼎, 바시리오)이 살고 있던 동골 교우촌(현 충북 진천군 진천읍 문봉리 혹은 연곡리나 백곡면 용덕리)에서 한 달 동안 머물렀다.

최양업 신부 귀국 여정
최양업 신부 교우촌 순방도

이후 최양업 신부의 활동은 교우촌 신자들을 위한 사목 순방으로 요약될 수 있다. 실제로 최신부는 1859년에 교리서와 기도서 편찬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다블뤼 부주교가 그의 사목 구역 일부를 순방해 준 것을 제외하고는, 1850년부터 1861년까지 12년 동안 프랑스 선교사들이 순방할 수 없는 어려운 지역을 담당하였다.

그에 앞서 최양업 신부는 1853년 여름에 자신의 거처를 진천 배티 교우촌(현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의 배티성지)으로 이전하고, 그곳에 있던 조선교구 최초의 신학교를 담당하게 된다. 이 교구 신학교는 다블뤼 신부가 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명을 받아 1850년에 설립한 것으로, 같은 해 9월경에는 배티 교우촌에 새 집을 마련하고 자리를 잡았었다. 다블뤼 교장 신부는 다음해인 1851년 말부터 1853년 여름까지 이 신학교를 전담 운영하다가 페레올 주교를 대신하여 교우촌 순방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 결과 최양업 신부가 배티로 와서 이곳을 자신의 첫 번째 사목 중심지요 본당으로 삼고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신학생들의 지도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최 신부는 1854년 3월 장수(Jansou, 楊 프란치스코) 신부가 타고 온 배편을 이용하여 배티 신학교에 재학하던 이 바울리노와 김 사도 요한, 임 빈첸시오 등 3명의 신학생들을 말레이시아 서안에 위치한 페낭(Penang, 波南) 신학교(현 말레이시아 북서안의 Penang주 조지타운시, 페낭교구신학교 소재)로 보냈다. 그리고 신학생들에게 계속 서한을 보내 관심을 표명하였다. 또 1858년에는 홍콩에서 휴양을 하고 있던 이 바울리노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조선으로 귀국한 제주도 표착인 김기량(金嗜良, 펠릭스 베드로)을 만나 성사를 주기도 했다.

신학생들의 유학으로 배티 신학교는 문을 닫게 되지만, 최 신부는 1856년 여름 무렵까지 배티를 사목 중심지로 삼고 전국을 순회하였다. 그러다가 경기도와 전라도로 거처를 옮겨갔고, 1858년 무렵에는 다시 경상도 지역으로 거처를 이전하였다.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 나타나는 지명(교우촌)
지명 현지명 서한 날짜 수신자
도양골 충남 부여군 내산면 금지 1리 1850년 10월 1일 로그레즈와 신부
절 골 충북 진천군 백곡면 용덕리 1851년 10월 15일 -
동 골 충북 진천군 진천읍 문봉리
혹은 진천읍 연곡리나 백곡면 용덕리
1854년 11월 4일 리브와 신부
배론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1855년 10월 8일 르그레즈와 신부
소리웃 미상(충청남도 혹은 전라북도) 1856년 9월 13일 -
불무골 충남 서천군 판교면 흥림2리 1857년 9월 14:15일 리브와 신부
오두재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1858년 10월 3·4일 르그레즈와 신부
리브와 신부
안곡 경북 구미시 무을면 안곡리 1859년 10월 11:12일 -
죽림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등억리의 간월산중 1860년 9월 3일 스승 신부들
고군산 전북 군산시 옥도면 신시도리 1847년 9월 30일 르그레즈와 신부
대공소 전북 부안군 변산면 석포리 - -
백령도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 1849년 5월 12일 -
초도 황해남도 과일군 초도리 849년 5월 12일 -
멍에목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구병리 1851년 10월 15일 -
진밭들 충남 금산군 진산면 두지리 1856년 9월 13일 -
만산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구운리 1857년 9월 14일 -

처음 최양업 신부의 사목 관할 구역은 충청도를 비롯하여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5개 도에 걸쳐 있었다. 1851년의 경우 최양업 신부가 순방한 교우촌은 모두 127개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들 교우촌의 이름은 대부분 알려지지 않고 있으니, 그 이유는 박해의 위험 때문에 교우촌의 이름을 되도록 밝히려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현존하는 최 신부의 서한에 나타나는 교우촌은 충청도의 도앙골(부여군 내산면 금지 1 리), 절골(진천군 백곡면 용덕리 혹은 다른 지역의 절골), 동골(진천군 진천읍 문봉리 혹은 연곡리, 백곡면 용덕리), 불무골(서천군 판교면 흥림2 리), 멍에목(보은군 내리면 구병리), 진받들(금산군 진산면 두지리), 배론(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전라도의 오두재(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경상도의 안곡(경북 구미시 무을면 안곡리), 죽림(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등억리 간월산중), 간월(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강원도의 만산(화천군 상서면 구운리), 그리고 소리웃(미상) 교우촌뿐이다.

1856년 이후 새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최양업 신부의 사목 관할 구역은 점차 축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담당한 지역은 여전히 다른 선교사들에 비해 훨씬 넓은 편이었다.

최양업 신부가 사목 순방에서 만난 신자수는 1850년에 3,815명, 1851년에 5,936명으로, 이러한 숫자는 전국의 신자 중에서 약 34.7 ~ 52.1%에 해당하는 높은 비율이었다. 또 어른 영세자수도 1855년까지는 전국 영세자수의 46.5%를 상회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1857년에는 그가 방문한 신자수가 전국 신자수의 26.8%를, 영세자수는 전국 영세자수의 33%를 점유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관할 구역이 축소된 때문이었다.

1860년의 경신박해(庚申迫害)로 최양업 신부는 경상도 남쪽의 죽림 교우촌(현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등억리 간월산중 교우촌)에 갇혀 지내야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밤으로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성사를 주었으며, 한 달 동안 나흘 밤밖에 휴식을 취하지 못할 정도로 신자들을 방문하는 데 열중하였다. 이때 그는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한국 천주교회의 구원을 간절하게 부탁하였다.

우리를 환난에서 구하소서. 엄청난 환난이 우리에게 너무도 모질게 덮쳐 왔습니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하신 당신의 유산을 파멸시키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높으신 데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우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 도움을 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최양업 신부의 1860년 9월 3일자 서한)

이듬해 초여름, 최양업 신부는 성사 집전 상황을 교구장 베르뇌 주교에게 보고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의 과로에다 장티푸스까지 걸려 진천의 한 공소(진천 원동 혹은 미확인, 경상도 문경 진안리 주막설은 잘못임)에서 선종하고 말았으니, 그때가 1861년 6월 15일이었다. 당시 최 신부의 나이는 40세.

베르뇌 주교는 최양업 신부가 선종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인 알브랑(Albrand) 신부에게 서한을 보냈다. 그리고 최양업 신부의 신심과 열심, 평소에 보여 준 사제로서의 분별력을 칭송하고, 동시에 그를 잃은 아쉬움을 표시하였다.

최 토마스 신부는 신심,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과 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로는 훌륭한 분별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유일한 한국인 신부 최 토마스 신부가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맺은 성사 집행 후에, 내게 자신의 업적을 보고하려고 서울에 오던 중, 지난 6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착한 신부가 처해 있는 위험에 대한 소식을 맨 처음 받은 푸르티에(Pourthié) 신부는 그에게 마지막 성사를 줄 수 있을 만큼 일찍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부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어 가는 그의 입술에서 아직 새어나오는 말이 단지 두 마디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이었습니다....... 최 신부는 12년 동안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저를 난처하게 합니다. 그가 성무를 집행하던 구역에는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서양 사람이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많은 마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베르뇌 주교의 1861년 9월 4일자 서한)

선종 후 최 신부의 시신은 그곳에 가매장되었다가 11월 초 배론(舟論, 현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배론성지) 성요셉신학교 교장 푸르티에(Pourthié, 中 요한) 신부에 의해 신학교 뒷산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제천의 신자들이 무덤을 단장하고 그 앞에 묘비를 안치한 것은 180년이 지난 1942년 12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