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성지는 한국 천주교 대표 성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첫째, 최양업 신부님과 선교사들의 사목활동 거점,
        둘째, 조선대목구 최초의 신학교,
        셋째, 박해시대의 교우촌,
        넷째, 순교자들의 본향입니다.

배티성지 이미지
배티성지 이미지
배티성지 이미지

배티는 '배나무 고개'라는 뜻입니다. 충북 진천에서 경기도 안성으로 넘어가는 이곳의 고개 주변에 돌배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한자로는 이치(梨峙)라고 표기하지요.

배티성지는 안성 칠장산에서 시작하여 태안반도 지령산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의 서운산(547m) 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백곡천이 시작되는 배티고개 아래에 있습니다. 조선 후기까지 충청도 진천현 백곡면에 속해 있던 이곳은 예로부터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던 오지인 데다가 충청좌도와 우도, 경기도의 접경에 위치하고 있어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을 떠돌던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살기에는 아주 적당한 곳이었습니다.

기록상으로 정확히 확인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 배티 일대의 산가지대로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들기 시작한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후 박해가 계속되면서 신자 수는 점차 늘어나게 되었고 1830년대 초에 와서는 믿음살이를 영위하는 신자들이 거주하는 안전하고 훌륭한 교우촌들이 산재하게 되었습니다. 1837년 5월에는 성 모방(나 베드로) 신부님이 배티 교우촌을 공소로 설정 하였습니다. 당시 교회 밀사로 활동하던 김 프란치스코의 집도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후로는 수원 느지지(현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가 고향인 복자 장 토마스, 충주 출신인 복자 송 베네딕토 가족 등이 배티 교우촌으로 이주해 와서 함께 살았습니다.

1850년에는 성 다블뤼(안 안토니오)신부님(1857년에 주교 서품)이 조선대목구 신학교를 설립한 뒤 배티 교우촌에 두 칸짜리 초가집을 매입하여 학교 건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초가집은 성당 겸 사제관이자 신학생들의 기숙사 역할도 했습니다. 1853년 여름부터는 최양업 신부님이 이 초가집에 살면서 전국 다섯 개 도에 흩어져 있는 교우촌을 순방하는 한편 틈틈이 신학생들을 지도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이 배티 교우촌을 자신의 본당 중심지로 삼은 기간은 대략 3년 동안이었습니다. 최앙업 신부님에 이어 배티 교우촌을 방문한 사제는 메스트르(이 요셉) 신부님과 페롱(권 스타니슬라오) 신부님이었습니다. 특히 순교자 프티니콜라(박 미카엘) 신부님은 1858년 10월부터 배티 교우촌을 자신의 사목 활동 거점으로 정하고 이곳에 있는 초가집을 성당 겸 사제관으로 삼았습니다. 다블뤼 주교님이 배티 교우촌에 와서 견진성사를 집전한 것도 이때였습니다.

< 배티 거주 및 순방 사제 현황(1850 ~ 1866) >

1850년 9월 이전 ~ 1853년 여름

다블뤼
조선대목구 신학교
운영 및 사목 순방

1853년 여름 ~ 1856년 여름

최양업
조선대목구 신학교
운영 및 사목 순방

1856년 여름 ~ 1857년 8월

메스트르
사목순방
(배티와 인근 지역 포함)

1857년 8월 ~ 1858년 9월

페롱
사목순방
(배티와 소학골 포함)

1858년 10월 ~ 1860년 11월 초

프티니콜라
사목순방
(충청, 경상, 강원, 경기 일부)

1861년 10월 ~ 1864년 여름

페롱
사목순방
(경상도 남부와 충청도 일부)

1864년 여름 ~ 1866년

칼래
사목순방
(배티와 삼박골 포함)

1866년의 병인박해가 발생한 뒤에는 경상도 지역을 순방하던 칼래(강 니콜라오) 신부님이 배티 이웃의 삼박골 교우촌(현 백곡면 용덕리)으로 피신해 와서 보름 남짓 머물며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집전하다가 소학골(현 천안시 북면 납안리) 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이후로 계속된 박해 때 배티와 인근 지역에 흩어져 있던 교우촌에서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합니다.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순교자만 34명입니다. 그중에서 배티 출신의 장 토마스 등 8명은 지난 2014년 8월 16위에 시복되었습니다.

박해가 끝난 뒤 배티 마을은 다시 교우촌으로 재건되었고, 1888년에는 공소로 재설정되있습니다. 1893년에는 이곳에 교리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이웃 용진골(현 백곡면 용덕리)에서는 윤의병(바오로) 신부가 성소의 꿈을 키웠습니다. 또 그때부터 이곳 천주학쟁이 묘지기들은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을 돌보면서 신앙선조들의 참신앙을 이어받는데 노력해 왔습니다. 배티 교우촌이 성지로 가꾸어지기 시작한 것은 다시 오랜 세윌이 지난 1977년부터였습니다.